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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 년도2012
  • 기관명강동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정애
  • 조회수2,181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은상 김정애 님의 이야기 입니다.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지겹게도 비가 온 올 여름도 이제 서서히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청아한 하늘을 본다 싶었는데, 한 두름 거센 소나기가 푸르른 가로수 잎들을 할퀴고 어느 쪽으론가 구름과 함께 멀어졌습니다. 지난밤 창문 밖에서 들리던 귀뚜라미 소리에, “아~ 가을이구나.”라고, 왠지 모를 슬픔을 느끼며 잠이 들었습니다. 잠시 눈 붙인 것 같은데 벌써 배격 다섯시 반. 부랴부랴 이것저것 준비하고, 아이들 깨워놓고 출근하노라니, 바쁜 걸음이었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의 슬픔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제 한 줌 기억으로만 남은 내 중년의 삶...

여자라면 누구나 소녀 적에 아름다운 꿈이 있겠지요. 학교졸업 후 하고픈 일하다가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남자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행복한 가정 꾸려가는 것... 나도 20대 초반에 몸이 아파 고생했었지만, 20대 중반에 군인아저씨와 펜팔을 통해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정이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 두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쯤 까지는 나의 결혼 생활은 평온하였습니다. 주위에선 아이들을 끔찍이 위하는 날 보면, 핀잔인지 칭찬인지 “유별나게 애들을 사랑한다.”며 수군댈 정도로 아이들 키우는 재미와 가정 꾸려가는 맛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평온한 가정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잘나가던 남편의 사업이 어느 순간 기우뚱하더니 급기야 주변의 모든게 회오리바람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부도가 나고 채권자들이 몰려오고, 술로 위안을 삼던 남편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어느 날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동화 속 집 같이 꾸며 놓았던 나의 아파트엔 시커먼 남자들이 들이 닥쳐 모든 가재도구에 빨간 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야말로 텔레비전 연속극 속에서나 가능한 장면이 내게도 닥친 겁니다. 차압이 들어온 얼마 후, 아이들 어릴 때 찍었던 사진앨범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나와 아이들은 빈손으로 거리에 내몰리게 되었고 그 후 내 인생은 그야말로 설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전 까지 사모님소릴 들으며 남편사업의 매장을 가끔 들렀던 나는 이제 동대문의 한 옷가게 점원이 되어 새벽 출근에 밤에 퇴근하게 되었고, 단칸방에서 엄마오길 기다리는 내 새끼들을 퇴근 후에 볼 때면,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몇푼 되지 않는 월급을 쪼개고 쪼개, 어쩌다 아이들에게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주면, 두 녀석이 금새 먹어치우다가도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내게, “엄마도 드셔야죠!”라고 말하지만 이미 그릇은 텅 비어있고, 연신 더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한 녀석들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설 때면, 양손 잡은 두 녀석과 한강물에 뛰어들고픈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행방불명이 되었던 남편은 어느 날, 너무도 초췌한 모습으로 우리 셋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남편의 겉모습에서 희망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하였지요. 과거를 털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줄거라구요. 그러나 기대감도 잠시, 남편은 심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고, 남편이 없어진 후로 잠잠했던 채권자들이 다시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남편의 주정, 부부간의 말다툼, 경제적 어려운_그 틈바구니에서 내 두 아이는 매일매일 야위어만 갔습니다. 이제는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만 갔습니다. 약국에서 매일 몇 알의 수면제를 사모아서 꽤 되었을 때, 자살을 시도하려 했지만 눈에 아른거리는 내 소중한 아들과 딸의 모습이 자꾸 내손을 쳐버리는 듯했습니다. “엄마, 뭐 하는 거야! 죽으려면 우리도 함께 데려가! 엄마만 저 세상으로 가면 우린 어찌하라고! 함께 가자 엄마야.” 귓속에 윙윙거리는 듯한 아이들의 절규에 나는 차마 수면제를 털어 넣지 못했습니다. 대신 죄 없는 소주를 연신 들이키고 의식을 잃어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몇 개월 지속되면서 난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어차피 죽지 못한다면 죽을 용기로 살자구요.’ 애들을 위해서요. 하지만 내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허울뿐이고 오히려 아이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이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폐인이 되어버린 남편도 이혼에 동의하였습니다. 법원에서 판사의 합의이혼결정을 확인하고, 두 아이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올 때에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성한 사람처럼 서있는 내손을 꼭 잡으면 어린 딸애는 얘기했습니다. “엄마, 앞으로는 좋은 사람만나서 엄마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 소리에 왈칵 솟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래 이 엄마의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너희를 위해서 열심히 살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러나 가진 것 없이 여자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일 저일 해보았지만 늘 힘에 겨웠고, 좌절 속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형제도 제 각각의 삶에 남과 다름없었고, 냉정한 세상 사람들에게서 온정은 아주 드믄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건강하고 별 구김살 없이 자라주는 아이들을 희망삼아 때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 그 자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구멍가게라도 해보고 싶은 게 정말 소원이었는데, 가게는 고사하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빚은 자꾸 늘어가고_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론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주민센터에 들러 상담을 하다가 사회복지사에게서 자활센터 얘기를 듣게 되었고, 뭔가 안정된 일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일자리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자활센터의 일원으로 일한지 이제 일 년하고 반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일이 좀 힘들어 적응하기에 애를 많이 먹었지만, 서로서로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동료들과 자활센터의 지원 덕분에 이젠 일이 몸에 익었고, 내직장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주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행사도 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짐도 느끼고 있습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일하게 되면 공동체사업단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우리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건,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하지만, 3~4년 이곳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공동체사업단을 맡아 열심히 꾸려가는 동료를 보면, 내게도 새로운 꿈이 자라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론 좀 힘들지만, 꾹 참고 몇 년 동안 열심히 하자! 내 가게를 직접 운영할 수 있잖아!”

인생의 여유를 느끼기엔, 아직은 아이들 뒷바라지가 너무 큰 걸림돌입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의 길을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섭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쳐봅니다. “용기를 가지고 활기차게 사는 거야!” 여리게만 살아온 내 인생이 야물어져 가고 있다는 표시겠지요. 끝으로, 힘든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신 강동지역자활센터 센터장님, 실장님 그리고 사회복지사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강동지역자활센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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