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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큼 나도, 나만큼 너도
  • 년도2012
  • 기관명해운대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오미경
  • 조회수2,481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의 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금상 오미경 대표님의 이야기 입니다.


너만큼 나도, 나만큼 너도

한 여자가 친구 앞에서 한숨을 쉬며 하소연한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겼는데 연봉도 얼마 안 되고, 좁은 빌라에 식구들이 오글오글 다 모여 사는 가난한 집이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게 어때서? 나는 그러는 니가 부럽기만 하다.”
“너무 가난하잖아, 그렇다고 연봉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러는 너는 부자니? 너는 그 사람보다 연봉 더 많이 받니?”
“뭐? 내가 부러워? 그런 너는 돈 많은 본부장하고 사귀잖아!”
“그러면 뭐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내게 남은 시간은 5개월도 안 되는데 혜원아, 나는 니가 너무 부럽다.”
요즘 시청률을 올리고 있는 주말드라마 ‘여인의 향기’ 속 대사다.


암으로 5개월 남짓 시한부인생을 사는 여인에게는 친구의 애인이 가난하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살 수 없다는 사실, 내 생이 다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절망일 것이다.
죽음도 삶의 양면이라 여긴다면 과연, 절대적인 절망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대개의 사람들이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 행불행을 경험하곤 한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은 그 모든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리라.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오랜만에 가져본 여유... 아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는 엄마를 변호하듯 말한다. “저희 엄마는 텔레비전을 못 봐요, 아무리 재밌는 내용이 나와도 5분도 안돼서 꾸벅꾸벅 졸고 계시거든요...” 내게 삶이란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잘라내고 어쩌면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는 것인양 바쁘게 사는 것만이 조건부수급자라는 이름표를 떼는 길이라 생각했다. 부족한 잠! 풀리지 않는 피로감...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고단했던 2~3년이 흘렀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결혼생활 10여년이 넘는 동안 사회에 다시 뿌리내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어느 날, 스님이 되는 길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가정을 위해서도 나은 길이라며 자기 발로 집을 떠났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애써서 가정을 꾸려왔지만 운명은 왜 이렇게 야속한 것일까? 어렵게 이룬 집을 정리하고 전세방 한 칸 얻을 돈도 없이 남겨진 아이들과 감당할 수 없는 가계 빚을 안고 나는 그저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나 막막함이 너무 크다보니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졌다. 괴로워할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일분일초가 응급상황이라는 판단에 그 모든 일체의 상념들을 붕대로 드레싱 하듯 내 감정을 동여매버렸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일한다는 자체가 큰 부담이었기에 생산라인에 설 수 있는 공장으로 달려갔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생산라인이 딱 이었다.

매일 아침 6시 40분이면 지하철을 타고 출근길에 올라 집으로 돌아오면 7시 20분...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11시 20분이다. 입학한 한 달 간은 학교생활적응을 위해서 3시간 마치면 점심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빤한 수입에 어디 맡길 데도 없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공장생활 3개월 무렵, 답답한 마음에 주민자치센터에 들러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안되겠어요, 우리 애가 하루 종일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디 시간 좋은 일자리 없을까요?”
“어머니... ‘자활센터’란 곳이 있어요, 일단 몇 가지 서류 챙겨 가셔서 상담 한 번 받아보세요. 어머니가 하실만한 일자리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해운대지역자활센터 - 장애통합학급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돕는 특수교육보조원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출근 첫날 나만큼 절망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내게 열린 세상의 문을 꽁꽁 닫은 채 일터로 향했다.
내가 처음 만난 아이들... 눈을 뜨고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고 입을 연다고 다 말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

내가 일해야 할 곳은 모 고등학교의 개별학급, 그곳엔 정신지체(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 그리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진단을 받은 아이들이 있었다. 장애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을 보냈더니 절로 하느님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 내 자신이 속보일 줄 몰랐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이 마음은 장애 아이들을 위한 마음이 아니라 ‘아이구 하느님... 이 아이들 보니 제가 가진 것이 얼마나 큰지 알겠습니다.’라는 상대적인 안도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그 아이들의 존재자체가 내게 삶의 힘을 일깨워주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동안 아이들의 불수의적인 공격행동에 꼬집히기도 얻어맞기도 하고 말이 통하지 않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화를 내기도 하면서, 장애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나는 수많은 편견의 껍질을 양파처럼 벗겨내야만 했다. 똑같은 말을 하루에 백번도 넘게 하는 아이들,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녀석들,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밥만 먹으면 약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는 아이들... 존재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들었고 더구나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멀고먼 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학급의 학부형과 통화할 일이 생겨 집으로 전화를 하자 그날따라 학생인 주원이(가명)가 전화를 받았다.

“주원아! 선생님이야... 어머니 계셔?” 그랬더니 학교에선 말도 잘 안하던 녀석이 대뜸 “오은정(가명)선생님... 오은정선생님...” 그런다. “그래 선생님이야... 주원아 어머니 계셔...” “네”, “어머니 바꿔줄래...” “네” 그러면서 한 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는 주원이, 나도 한참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수화기너머로 “주원아 누구야... 엄마 바꿔봐...”라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주원이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말한다. “선생님 우리 주원이 전화 받고 이렇게 오랫동안 수화기 들고 있는 거 처음이에요... 선생님 너무 고마워요.” 감동하는 어머니한테 달리 드릴 말이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러지. 아이한테 차분하게 그저 내 자식 대하듯 대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말도 잘 못하는 이 아이가 나를 이렇게 신뢰했다니... 라는 생각에 그동안의 힘든 일들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돌이켜 보면 소속된 해운대지역자활에서의 빡빡한 보수교육 들을 때마다 땡땡이도 좀 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나서 현장에 갔을 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실무에 도움되는 강좌이외에도 자활에 필요한 다양한 능력, 특히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보수교육까지 이론과 실무의 보완을 위해 쉴 새 없이 자극과 용기를 준 곳이 바로 지역자활센터였다.

여름이면 입장료가 비싸 엄두도 못내는 리조트 물놀이장에 가족들을 초대하고 중간 중간 가족운동회를 열어서 서로의 사기도 돋궈주고 연말이면 한 해를 결산하는 의미에서 실무자와 자활 참여자들간의 라포를 형성하기위해 값비싼 연회장으로 초대해서 용기를 북돋워주려 노력하는 모습들.

그러나 아직도 주변사람들이 “우리나라 참 살만해 졌어요... 자기만 노력하면 괜찮네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직도 제발 그런 소리는 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한 예의라는 것도 이제 내가 힘든 입장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의 일선에 계신 지역자활센터의 실무자분들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고난과 역경에 처한 마음은 이렇게 진정한 내 편일 때라야 신뢰할 마음이 열리나 보다, 참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 주어진 시간만이라도 우리서로 맘 편히 잘 지내보자, 정확한 결론도 어떤 탁월한 선택도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미 하고 있던 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011년 3월 2년만에 드디어 부산의 모 중학교 특수학급에 시교육청 소속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지역자활센터에서 목표로 하는 일차적인 자활에 성공한 것이다. 그동안의 근무태도가 교장과 통합반 교사 특수교사에 의해서 평가되어 교육청으로 보고되었다. 뒤에 들은 후담으로 모두 만점을 주셨다고 한다. 또한 취업을 위해서 장애통합을 맡은 팀장님 역시 학교와의 원활한 관계유지를 위해서 동분서주 해주셨다.
1차적 목표의 자활을 이룬 기쁨에 이어서 진정한 자활은 어쩌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져야 할 일이다.

시교육청 소속으로 특수교육보조원의 일을 하는 동안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다가왔다. 지난 연말 무렵 둘째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16주의 중상을 입은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해자 측은 10개 항목 위반에 종합보험 가입도 안 들어있는 상태였다. 4개월간의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이의 치료와 출근, 그리고 진행되는 공부들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4개월간의 치료 후 퇴원을 하고 2주전 아이는 세 번째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책임 보험료가 상향조정되어 지금까지의 치료비를 충당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지역자활센터 팀장님은 힘든 아이를 위해 간병인을 우선적으로 보내주고 그 기간도 연장해 주는 등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도움을 주셨다. 산 넘어 산, 여기까지 결코 혼자 넘어올 수 없는 산들이었다.

지금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나는 사랑한다. 물론 급여 면에서나 또 무기계약직으로 채용되는 날까지 넘어야할 한 차례의 산이 더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소득은 내가 마음을 다해 하고 싶은 일들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장애를 더 많이 이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도 중요한 경험이지만 이론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할 필요성을 나날이 더 느낀다.

다행히 누구보다 아이들을 위한 마음으로 일하시는 특수교사를 만나서 우리학급의 하루는 아이들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기는 가족 같은 분위기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이 즐겁고 하루하루가 기다려진다. 그런 일터의 보람은 나의 지적 자극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대구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정서행동장애학회의 행동치료사 자격연수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사이버연수는 물론이고 겨울방학과 두 번의 여름방학동안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여관방을 잡아서 하루 10시간 일주일 60시간의 강의일정을 세 번이나 소화했다. 이제 360시간의 연수와 두 번의 시험을 통해서 행동치료사 (심리행동적응지도사)자격 2급과 틈틈이 미술심리치료를 공부해서 미술치료사 2급 자격도 통과했다.
그리고 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 4학년 2학기 등록을 얼마 전에 끝냈다. 4학년 1학기까지 성적 우수생의 영광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것도 내 아이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언젠가 장애 아이들과 함께 할 치료실을 여는 날까지 열심히 해 볼 작정이다.
몇 년 후면 석사를 마치고 다시 박사과정에도 도전하는 날도 올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아이들과 행복해지기 위한 길일 때에 나의 전진이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만큼 힘든 사람 또 있을까...’ 쭈뼛거리는 마음으로 만났던 사람들, 자활을 위해 함께하는 지역자활센터의 실무자들 그리고 장애통합이라는 타이틀로 만난 자활참여자들... 나를 돕기 위한 사람들과 나와 비슷한 아픔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그 속에서 함께 협력했던 시간들이 주는 위로는 결코 세상 아픔은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위로는 학교현장에서 만난 장애 아이들이었다.

그래! 너만큼 나도, 그래! 나만큼 너도... 너도 나도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 서로 살아있어 그렇게 사랑하고 나눴으므로...’

그렇게 장애통합교육보조원 일은 내 생의 큰 사건이자 축복이었다.
성장의 한 축은 늘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성공은 9,000번의 샷을 위한 노력과 300번의 경기실패에서 비롯됐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 너만큼 나도, 나만큼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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