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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두부를 파는 사나이!
  • 년도2011
  • 기관명한국자활복지개발원
  • 제출자박동음
  • 조회수2,542

*자활수기집 제9호(희망사다리) 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대상 박동음 대표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행복두부를 파는 사나이
!

새벽 2시! 알람시계가 오늘도 나의 하루 시작을 알린다. 정말 5분만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 벌써 3년 7개월을 넘었다. 하지만 매일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도 난 두부를 만들어 달성공원 새벽시장으로 달린다. 새벽시장은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새벽시장에 두부를 팔러 다닐지 알 수 없지만 이 시장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난 계속해서 내 고객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첫 번째 좌절 = 실직... 수급자>
난 7년 전에는 아내와 2명의 아들을 키우면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미고 살았다. 섬유회사에 다니면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도의 가정을 이루면서 소박한 삶에 작은 행복을 느끼는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다니던 회사는 사장님의 정치활동을 시작으로 점점 어려워져 갔고 결국 임금 채불로 이어져 당장 생계를 걱정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각오로 아니 회사를 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도 나서지 않는 노조위원장을 맡으며 회사를 정상화 시켜보겠다고 밤낮 집에도 못 들어가면서 회사와 싸웠다.
그 결과 나에게 찾아온 건 사장님의 고발장이었다. 그 후 난 법정에 서야했으며 조금 있던 재산도 다 탕진하고 결국 회사를 떠나야했다.
실직!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난 노조위원장 출신이라는 타이틀로 아무데도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고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으로 살았는데 나에게 너무나 힘든 시련이 온 것이다.
3살, 4살 두 아이를 보면 그저 눈물만이 하염없이 나왔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못난 아버지, 못난 남편으로 바뀐 내 자신이 너무 싫어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방황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이들이 눈에 밟혀 굶어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동사무소에 무작정 찾아갔다. 막상 동사무소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보였고 인생의 낙오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때, “어떻게 오셨는데예?”라고 공무원이 말을 걸어왔고 난 그저 “저기... 그러니까...? 아닙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나와야만 했다. 도무지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죽어버릴까?’ 정말 못난 생각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난 정말 성실하게 살았고 죄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이 다가오는 것인지에 대한 억울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우리 부부 사이에도 점차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짜증으로 번지고 그로인해 싸움도 잦았다. 이렇게 살다간 우리 가정이 너무나 위태로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고?”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까지 내뱉으며 서로를 원망하며 싸우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바닥으로 떨어질 데도 없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깐 저절로 동사무소로 발길이 옮겨졌다. 동사무소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결국 난 수급자가 되어 자활근로사업과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첫 번째 희망 = 자활과의 인연... 새로운 도전>
2005년 3월 14일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대구북구자활후견기관에 처음으로 일을 하러 나간 날이다. 낯선 환경에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되고 의기소침하게 된 나를 발견하였다. 초기상담을 실장님과 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듣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일들 중에 크게 마음이 가는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두부사업단이 왠지 그나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다행히 두부사업단이 만들어진 지 1년이 되지 않는다 했고 두부 만드는 실력들이 아직 이렇다 할 만큼 좋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실장님이 두부제조 기술은 학원이 없어서 아무데도 자세하게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내가 한 번 제대로 두부 만드는 실력을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게 되었고 정말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두부제조법을 알기 위해 인터넷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보고 작업장에서 연습을 해 보았다. 실제로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 한 것이 시장에 있는 두부가게를 방문해서 물어보자는 생각을 하였고 나름대로 유명하다는 두부가게를 찾아서 두부제조법을 물어보려고 애도 썼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서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보니,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두부가게 사장님이 있었다. 시간을 내어 우리 작업장에 직접 와서 가르쳐주겠다는 것이었다. 너무 고마웠고 그 분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두부사업단의 두부제조 기술이 나날이 발전되어 갔고 수주처도 나날이 늘어나게 되었다.
두부만 잘 만들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이 서로를 힘들게 했고 나의 의지를 조금씩 꺾기도 했다. 두부 영업과 판매 때문에 2교대로 근무 조를 나누어 근무를 했는데, 내 근무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두부에 대해 더 공부하고 연습을 해보기 위해 남으면, 사무실에 스파이로 활동한다는 오해를 받는 등의 갈등들을 가지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시간이 2년 정도 흐르고 난 내 인생의 목표를 하나 세우게 되었다. 바로 자활공동체 창업의 꿈을 가졌고 반드시 내가 그 주인공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매출을 올리기 위해 뛰어다녔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탱글탱글하면서 구수한 즉석두부를 만들기 위해 두부를 바닥에 던져도 보았고 다른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사서 시식도 많이 해 보았다.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고 우리 두부가게에서 만든 두부가 구수하고 맛있다는 소문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실장님에게 찾아가 공동체를 만들어 주길 부탁하기 시작했다. 실장님도 그 과정들을 다 지켜보고 있었고 충분히 그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지만, 공동체를 성립하기 위한 여러 조건들이 다 맞아야 한다고 조금씩 준비를 해 나가자고 하셨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지만 내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매주 한 번씩 공동체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부린 것 같기도 하다. 난 정말 자신이 있었고 반드시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몇 년간의 좌절감을 이제는 떨쳐버리고 싶은 심정이 앞선 것이다.

그러기를 몇 달째... 드디어 실장님으로부터 한 번 해보자는 얘기를 듣고 정말 기쁨을 감 출 수 없었고 설렘과 우려감이 같이 교차되었지만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그 때부터 실장님과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자활공동체 단기, 중기, 장기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서로 논의하게 되었고 하나씩 준비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2008년부터 자활공동체로 창업하는 것을 목표로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 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무실에서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두 번째 좌절 = 아들의 장애판정... 가정불화>
힘든 시기를 지나 인생의 다음 목표를 세우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큰 아들에게 무슨 큰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우리 큰 애가 자폐증세가 있는 것 같으니 제대로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이었다.

“설마! 선생님이 잘못보신 거겠지예! 말이 조금 늦다 뿐이지... 크게 잘못된 건 없잖아요!”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뭔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기를 믿고 싶었던 것이다.
애 엄마는 절대 아니라고, 다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사조차도 받지 않겠다고 하여 한 동안 그냥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은 “하루라도 빨리 전문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수도 있는데 왜 가만히 계시냐?”고 하였다. 누구보다 답답한 건 나 자신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오랜 설득 끝에 전문기관에서 검사를 받았고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 자활 사무실의 도움으로 후원자님들 덕분에 전문기관에서 치료도 받게 되었고 더 나빠지지 않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세 번째 좌절 = 이혼... 가족과의 이별>
큰 애가 자폐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아내는 너무 큰 충격에 빠졌고 잘 헤어 나오질 못했다. 친구들과 술을 먹는 자리가 많아졌고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날도 늘어갔으며 그로 인해 우리 부부의 싸움은 계속 되었다.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내를 설득도 해보고 원망도 해보고 울면서 애원도 해봤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의 불행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생각에 혹시 나도 우울증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자식들을 봐서라도 힘을 내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 부부는 극단의 길로 자꾸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급기야 아내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정말 이혼만은 막아보고 싶었고 아내를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은 진행되어갔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아내도, 자식도 내 곁에서 다 떠나가 버렸다. 이것이 내 운명이었다.
사무실에는 걱정할까봐 이런 사실을 얘기 할 수가 없었다. 혼자 괴로움을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모든 걸 체념한 채 다 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성공을 해야 내 자식들이랑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용기를 내고 앞으로 전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희망 = 자활공동체 창업... 탈수급>
자활공동체를 위한 준비는 실장님과 함께 차질 없이 준비했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시장을 돌아다녔고 마침 우리 여건에 맞는 점포를 찾았다.
2007년 12월 28일 드디어 북구청으로부터 ‘착한농부촌두부’ 자활공동체를 공식 인정받게 되었고 그렇게 바라던 창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실직 후 몇 년간 마음 고생했던 생각들이 떠올라 감회가 남달랐던 것 같다. 실장님께서 공동체 창업 후 처음에는 우리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 매출이 많이 저조 할 수도 있다고 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 월급도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였는데, 정말로 공동체 창업 후 첫 달 월급은 20만원이었다. 그럴수록 오기가 더 발동되어 열심히 발품을 팔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한 것 같다. 우리는 두 번째 월급부터는 정상적으로 받을 수 있을 만큼 정말로 열심히 우리를 알렸고 노력을 하였다.
창업 초기에는 브랜드 홍보와 지역주민들에게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여되었지만, 지금은 ‘착한농부촌두부’에서 만드는 두부는 어느 업체와 견주어도 제품의 질적, 양적 평가에서 뒤지지 않는 자신감과 노하우를 겸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시간은 3년을 지나 어느덧 4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난 꼭 성공해서 자활근로사업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께 본보기가 되고 싶다는 각오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집념과 일념 하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고 달성공원 새벽시장에서 두부를 판매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시장에서도 정식으로 인정받은 노점에 가서 하나라도 더 팔기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두부 상품개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반두부 제조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통해 참숯두부, 깨두부, 검은콩두부, 쑥두부 등의 상품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일까? 우리 ‘착한농부촌두부’ 공동체는 천원 짜리 두부를 팔면서 하루 평균 30만원 이상, 월 평균 1,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고 지역주민들에게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가게로 인식되어 나름대로 안정적인 수익창출을 올리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전국 자활기관에서 두부사업을 해 보겠다고 하여 우리 두부가게를 선진지 견학 차원에서 다녀간 횟수가 여러 번이다.
내가 어렵게 터득한 기술인만큼 같은 자활기관에 있는 동료들이 원할 때는 그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개방하는 입장으로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겠다고 자활 사무실과 약속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
이렇게 수급자로 자활근로에 참여하고 몇 년을 보낸 지금, 난 다시 소득증가로 인해 수급자에서 탈피하여 일반인의 삶을 다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 난 “대구시장상 표창”을 받는 등 지역사회에서 많은 관심과 배려 속에 진정한 자활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세 번째 희망 = 마을기업 운영... 나누며 살아가는 삶>
두부와 함께 한 지 6년! 난 이제 두 번째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은 바로 순두부 전문식당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정말 나에게 이제 좋은 일들만 생기는 것일까? 내가 꿈꿔왔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에 행정안전부에서 지원하는 마을기업사업 공모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사무실에서는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순두부식당 운영 계획을 잊지 않고 한 번 도전해 보자는 결정에 함께 준비하였다. 그 결과 내가 희망한대로 마을기업에 선정된 것이 아닌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난 사적으로 내 돈을 벌기위한 계획이 아니다. 바로 내가 오늘 이렇게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나도 이제 이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나같이 어려운 사람들이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고 돈을 많이 벌어서 다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욕심에 또 다른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꿈은 시작되었다. 지난 6월에 순두부식당이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오픈을 한 것이다. 난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모은 내 전 재산 1,000만원을 마을기업 점포 임대보증금으로 지불하고 이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가지고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한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설명할 길이 없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 그 사람들은 날 바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내가 가진 생각이 결코 잘 못 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고 진정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하루를 새벽 2시에 시작하여 두부를 만들고 새벽시장에 나가서 두부를 팔고 다시 점포로 돌아와 거래처에 배달가고, 틈나는 시간에 순두부식당에 가서 일을 도와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몸은 고단하고 지칠지 모르나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지는 이유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신은 자립을 했습니까? 진정 자활을 한 겁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마음이 풍요로우니 자립?자활을 한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오늘도 난 나의 애마 다마스 차량에 두부를 싣고 행복을 팔러 다니고 있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내 자식들과 작은 보금자리에서 같이 살면서 이 작은 행복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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