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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쓸모없다면, 그대에게는 슬픔도 없다
  • 년도2018
  • 기관명대전유성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조정현
  • 조회수2,001

  여상을 졸업하고 신용협동조합에 취직해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다. 그는 사업의 꿈을 꾸며 퇴사했고, 이듬해인 2000년 11월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땐 무슨 생각이었을까?

 

  2004년 7월 사표를 던진 날!

 

  10년 넘게 나름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잘 다니던 직장에서 더럽고 치사해서, 혹은 무슨 웅 심리에서나, 호기를 부리며 당당히 사표를 던져 버렸다.

 

  퇴사한 후 3개월쯤, 남편 사업을 돕던 어느 날 업장으로 들이닥친 거래처 직원들은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왜 며칠째 전화를 안 받으시죠?”라고 다그쳐 물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산산조각 났다. 꿈은 내 인생에서 정말이지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 다른 시작의 결과, 남편은 경제사범으로 10개월 형을 받고 교도소에 복역하고 있었고, 나는 네 살 큰아이와 뱃속에 3개월의 새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13만 원 두 평짜리 단칸방을 얻어 도마동으로 이사를 했고, 아이들과 함께 기초 생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축복받고 조심해야 할 임신 초기에 나는 택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만삭의 배가 핸들에 가까이 닿아 위험했던 8개월까지, 이 일 말고는 달리 경제난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경제적 몰락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파트, 상가, 시어머니 소유의 고향땅, 친정집마저 여러 차례 유찰되어 헐값에 경매로 넘어갔다. 가족 모두 신용 불량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빚은 해결되지 않았다.

 

  남편이 출소한 뒤 어렵지만 근근이 최저 생계만 유지하고 생활했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빚 독촉에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평소에 성실함을 무기로 생활한 터라 숨겨 놓은 재산이 없다는 것과, 힘들게 생활하는 것을 알게 되어 채권자 스스로 거래장을 찢어 버리는 분도 있었고, 감사하게도 더 이상의 빚 독촉은 하지 않았다.

 

  그 장면이 가끔 떠오르면 지금도 가슴이 눈물과 한숨으로 먹먹해 진다. 우리 부부는 다시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지난 모든 어려움을 갚고자 게으름 부리지 않고 땀으로 생활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말했다.

 

“차라리 정리하고 혼자 살지.”

 

  그러나 돈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먼 훗날 아들과 딸에게 부모가 시련 속에 서로를 믿고 도와 가며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큰 재산임을, 가정이 천국이라는 하나님 말을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째가 돌이 막 지나던 2009년 2월부터 진잠동 주민 센터 복지 도우미로 일하면서 자활과 인연이 되었다. 자활 참여 제한 기한 변경으로 인한 자활센터 참여를 위한 첫 상담에서 2013년 5월부터 대전 유성 지역자활센터 사업단 전담 관리자로 일해 보겠냐는 실장의 제안이 있었다.

 

  일이 필요했던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했다. 혹여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다.

 

  자활을 알면서 내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2008년 갱생공단의 도움으로 단칸방에서 8평의 투룸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2012년 6월 지금 살고 있는 15평 LH 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시간이 지나 평수가 늘어나듯 내 삶에 기적 같은 기회가 왔다. 2015년 1월 유성 지역자활센터 ‘정·규·직·채·용’! 꺄아! 바삐 사느라 준비해 놓은 스펙은 없었다. 그러나 복지 도우미 일을 하면서, 자활 근로 전담 관리자 일을 하면서, 지침을 읽고 습득했고 타 자활로 자문도 구하고 열심을 다했던 것은 사실이다.

 

  면접은 ‘뭘 좀 알고 있는’ 내게 유리했다. 유성자활이 추구하는 미션과 비전, 가치에 대해, 전담 관리자지만 실무자들과 공유했던 노고와 시간들이 인사위원회에서 인정받아 당당히 채용되었다.

 

  정말 감사했다! 이제는 일자리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고, 신규 6급 1호봉! 정년까지 있는 직장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남편이 제대로 생활비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탈수급을 할 여건도 아니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전담 관리자로 있으면서 가입했던 내일키움통장도 있었다. 만기가 채 되지 않았지만 취업을 통해 장려금과 수익금으로 3배수 가까운 금액을 수령했다. 겹경사다!

 

  이런 기분일까? 세상을 다시 사는 기분은? 내 수중에 몇 백만 원이 들어온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장 아이들의 치아 관리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충치가 악화되어 치료비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내일키움통장 지급 해지 수령액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모처럼 부모 노릇한 것 같아 정말 뿌듯하고 후련했다.

 

  자활 사업 참여 주민만 누리는 특권! 내일키움통장!

 

  자활 사업에 참여해 매출액에 따라 내일키움 수익금이 쌓이고, 정부에서도 내일 근로 장려금을 보태 주고, 중앙자활센터에서도 내일키움 장려금을 주며, 3년 만기 해지 시 1천5백만 원 안팎의 어지간한 매입 임대 주택 보증금으로 월 납입금을 줄일 수 있는 등 일석이조가 될 수 있는 제도이다. 물론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기초 생활 수급자로 보호받는 사람들에게는 종잣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다.자활센터에 종사자로 정식 채용되어 내일키움통장 지급 해지를 받은 후에 2015년 5월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통장에 가입하는 동시에 탈수급과 아이들의 대학 진학을 생각해야 했다.

 

  아직 제대로 된 집 얻을 전셋돈도 없는데, 희망키움통장에 가입하고 해지할 때쯤이면 첫째 아이가 고1 인데 모아질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했지만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활센터 종사자로서 나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탈수급과 자립, 자활에 대해 교육하고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스쳤다. 경제적으로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당당하고 싶다.

 

  우리 부부는 그래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래서 마음먹을 수 있다, 도전할 수 있다! 희망이 고문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내일을 살기로 했다.

 

  첫째 아들이 어느 새, 중3이 되었고 둘째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딸은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월세가 뭐냐고, 우리 집은 진짜 우리 집이냐고 철없이 굴 때도 있지만, 계획대로 2017년 1월 드디어 탈수급을 했다.

 

  제도의 도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솔직히 약간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LH 임대주택공사에서 소득 분위가 초과될 때까지는 거주할 수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두려움조차 없어졌다. 나와 내 가족에게 봄이 온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추위를 견디기 위해 누군가가 준 두꺼운 겨울 외투를 벗듯이, 그동안 받아 누린 복지 혜택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기분이 들어서 나름 홀가분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이제는 크게 욕심을 내어 시중보다 20퍼센트 저렴하게 LH 주택공사에서 분양하는 신축 다세대 전세 주택을 청약할 계획이다. 2018년 내년 5월 희망키움통장 만기 해지를 목표로 노력 중이다.

 

  지난 8월에 기회가 있었지만 전세금도 너무 비싸고, 핑계를 대자면 지금보다 주거 환경은 훨씬 좋지만 주방 씽크대가 작아서 포기했다. 내게도 안목과 선택의 자유가 있음에 또 한 번 쾌감을 느끼면서도, 또다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상 기도로 먼저 나아가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예전에는 나와 상관없는 주택 사업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즈음 우리 가정에 제1순위 안정적인 주거 생활을 위해 주택 관련 공지 을 자주 들여다보곤 한다. 문제 앞에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 하나님을 의지한 것은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주셨을 때이다.

 

  아직 남편은 호기를 부리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 남편도 조금 큰 슈퍼에서 매장을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 가는 중이다. 비록 경력이 없어 월급은 적지만 몇 년 동안 성실하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매니저라는 기회가 생길 것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 아이들은 학생답게, 부모는 책임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다시 한 번 세상을 향해 두 팔 벌려 환호할 수 있는 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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