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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소개

절망에서 희망으로
  • 년도2017
  • 기관명광주북구일터지역자활센터
  • 제출자최길홍
  • 조회수2,124

*자활수기집 제13호에 실린 자활성공수기 입선 '최길홍 님'의 이야기 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군인에서 신용불량자로
사람은 누구에게나 말 못한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나 역시 굴절된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시절이었습니다. 경남 밀양의 시골 마을에서 9남 1녀 중 아홉째로 태어나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나마 저는 형님, 누님보다는 늦게 태어난 축복으로 중학교까지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시골에서 살기 싫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늘 도시로 나가서 멋지게 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3세 때 군 입대를 통해 내가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사병으로 시작하였으나 훈련 도중 장기 부사관 제도가 있는 것을 알고 장기 부사관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렇게 저의 군 생활은 시작되었고 25년 동안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군 생활 과정에서 결혼도 하고 딸도 하나 낳고 잘 살아왔습니다. 1990년대 중반 처남과 처형의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여 대출 보증을 서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될 줄은 몰랐습니다. 믿고 있었던 사업이 실패로 끝나고 처남과 처형은 자신의 의무를 저에게 떠넘겼습니다. 보증을 잘못 서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절감하였습니다. 대출금을 막다가 한계에 다다라 연체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신용불량자가 되고 군대에서도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나락에 바닥이 있을까?
그 이후 계속되는 빚 독촉에 살길이 막막했지만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친구가 서울에 일자리가 있다고 하여 서울로 이사를 가 플라스틱 공장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해 일하지 못하고 이곳에서도 경기 악화로 관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비, 일용직 막일 등의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처남과 처형 때문에 전역하게 된 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던 아내도 점점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저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자도 식당 주방 일을 하면서 심신이 많이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갈등이 심해졌고 끊임없는 가정불화로 결국 2000년 합의 이혼에 이르게 됐습니다. 고 3이었던 딸은 어머니를 따라갔고 이혼 이후 부인과 딸은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용불량자에 이혼까지 하게 되면서 삶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도 둘째 형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광주로 내려와 일용직 일을 하면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모텔 달방에서 월세로 근근이 생활하였으나 그마저 형님께서 지원을 끊자 일자리가 일정치 않던 난 결국 노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작 꿈꾸다.
그렇게 시작된 노숙생활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용직 노동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진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의욕도 조건도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몇 달간
노숙생활을 하다가 광주공원에 무료급식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무등복지관 노숙인 쉼터 안내 현수막을 보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상담을 했고 2012년 8월 11일 입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는 친절했고 내가 다시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애써주었습니다. 쉼터에서 무료로 숙식이 해결은 되었으나 생활고 해결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쉼터에서도 오래 머물수 없기 때문에 자립하기 위한 돈도 모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용직 일이란 것이 운이 따르는 일이어서 나에게는 큰 행운이 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날을 일하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복지관 사회복지사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면 국가 보호 속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북구청에서 상담을 진행하고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 지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다행이었습니다. 이제 나도 번듯한 일자리를 갖게 되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삶의 안정을 되찾다.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가 되어서 소개받은 곳이 이곳 광주북구 일터지역자활센터입니다. 2012년 11월 19일에 인큐베이팅 사업단 ʻ여럿이 함께ˮ에 배정되어 처음 자활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활사업이 무엇인지 자활사업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꿈꿔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탈수급을 할 것인지 교육과 상담을 통해 자립역량을 키우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막막하기만 하던 미래에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일 하니 74만원의 급여가 통장에 들어왔습니다. 몇 년 만에 받아보는 월급이었습니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이 끝난 후 나에게 맞는 일자리가 무엇일까 센터에서 상담 논의한 끝에 미역 줄기선별 작업을 하는 자활 근로 ʻ바다 마을ˮ사업단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손목과 팔이 아프기도 하였지만 큰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월급이 들어왔고, 식대와 용돈 20만원을 제외한 54만원을 저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노숙인 쉼터에서 나와서 자립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삶의 안정을 위해 열심히 저금하며 자활사업에 성실하게 참여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자활센터 사례관리자께서 좀 더 건강한 삶을 위해서 치아치료를 하게 해주었습니다. 자활센터에 들어와서 마음도 건강해지고 몸도 건강해지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도약이다.
지금은 임대 아파트에서 둥지를 틀고 나의 좌우명인 현실에 만족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활센터에 참여한 지 횟수로 어언 3년여가 지났습니다. 바다 마을에서 2년, 청소사업단인 아토클린에서 4개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때 나는 그야말로 무일푼의 신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급급하여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희망의 실오라기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절망의 삶 속에서 알게 된 지역자활센터는 천상에서 내려온 복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활 참여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꿈꾸게 되었고 내일의 희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긍정적인 마음과 행동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안정을 넘어서 좀 더 역동적인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일하며, 나만 잘사는 것을 넘어 동고동락하는 동료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보려 합니다. 그 길이 자활기업으로 창업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활 근로 사업에서 기술을 익히고 공동체성을 키워 우리가 함께 커가는 기업을 만들 준비를 잘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전 여전히 내 인생의 새로운 도약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