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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작은 빛이 되어
  • 년도2018
  • 기관명 부천나눔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연자
  • 조회수2,052

내 이름은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 오랫동안 불렸던 내 이름이었습니다. 거의 하루 종일 꼬박 걸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다리 관절이 망가져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든 통증 때문에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6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스펙도 실력도 없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이혼녀인 나는 막상 새로운 일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열심히 기웃거려도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자활센터와의 만남

  날로 불안해지던 어느 날, 다행히도 아는 지인을 통해 지역자활센터에 가서 상담을 하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집에서 가까운 부천 나눔 지역자활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사업 담당 팀장님과 상담 후, 당시 복권 기금 사업단이라 불리던, 지금의 재가 방문 요양 보호사의 역할인 가사 간병 일에 배치되어,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해보는 일에, 평소 나답지 않게 주저하지 않고 겁 없이 뛰어들었던 것은 부천 나눔 자활센터와 궁합이 맞으려고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 긴 인연. 말하자면 천생연분이 된 것이지요.

    

 

한걸음씩……

  가가호호 가정집을 방문해서 어르신 말벗도 해 드리고, 가사 일도 도와드리면서 근무하는 동안,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어르신들과 환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 무식하고 천방지축으로 살아서 나이만 많지 철없던 내게 세상을 보는 품이 조금은 넓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1년쯤 근무하다 보니 일이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더 이상 똑같은 일상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싫어서 오래도록 구르마를 끌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닌 저기에 또 병이 도진 것이었습니다.

 

  답답함에 그만두고자 하는 제게 센터의 팀장님은 “그러지 말고, 김○자님은 싹싹하고 품성이 좋아 어르신들이 참 칭찬을 많이 하시는데……. 여러 병원에서 어르신들을 간병하면서 김○자님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서 일해 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2008년 복지 간병 사업단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소사역에 있는 세종병원에서 첫 간병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옆의 환자가 대소변을 침상에서 받아 내는 그 순간에도 간병사들이 담담하게 식사를 하고 묵묵히 케어하는 걸 보니, 사람의 놀라운 적응력에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이곳에서 다시 뿌리내릴 수 있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날 근무 후 집에 왔을 때 손과 옷에서 나던 병원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실력도 없고, 행동도 빠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믿는 것은 어떤 환경이든 조건이든, 묵묵하게 일을 수행하는 성실성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 앞에서 강의도 하지만,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간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쌩초보습니다. 하지만 내 가족처럼 환자를 돌보다 보니 차츰 좋아져서 퇴원할 때면 일에 대한 보람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고,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즐겁게 근무하다 보니 어느새 복지 간병 사업단의 반장이 되었고, 경력자들도 힘들어 하고 꺼려하는 중환자실에서 한 달 내내 근무를 자원해 중환자를 케어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침상 앞에서 덜덜 떨던 초보는 어느덧 어르신들의 마음을 읽어 내는 베테랑으로 탈바꿈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발견

  2008년 7월, 센터에서 행정 업무와 간병 팀의 조직 관리 알선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인터넷 사용법도 모르는 ‘컴맹’인지라 손사래를 치는 제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있나요? 간병 일도 처음에는 벌벌 떨더니 이제는 베테랑이 되었잖아요? 혼자라면 힘들지 모르지만, 우리가 있잖아요. 모두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아요.”라는 격려 덕분에 용기를 냈습니다.

 

  참 답답하고 속이 터질 만도 하련만, 컴퓨터를 켜는 것부터 자판을 익히기까지 하나하나 꾹 참고 알려주신 팀장님과 센터분들이 지금도 참 고맙습니다.

 

  엑셀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나였는데, 1년 정도 사무실에서 일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자판도 외우고 함수라는 것도 제법 만들어 쓰는 중급의 실력이 되어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컴퓨터를 활용하는 것도,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참 서툴던 난데…….

 

  성실성 하나는 타고났다고 자신하지만, 천방지축이던 성격이 문제라 주변의 우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병 실전에서 배운 적응력이, 근질근질 휘젓는 바람을 잠재워 성격도 정말 참참해졌나 봅니다.

 

  묵묵히 5년 동안 조직 관리를 하며 근속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병원 간병 알선을 하면서 나보다 연배가, 적게는 10년에서부터 20~30년 많은 간병사들을 관리하는 일에, 병원 현장에서 간병사로 일한 실전 경험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계획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하며 적응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새로운 길들이 열렸고,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활센터에 오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저라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틀 안에 갇혀 한 치도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역자활센터가 내게 준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난 참 운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송이에서 자활 기업의 대표로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키운 건 내 애간장을 무던히도 태웠던 간병사님들이었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지만, 사실은 알선하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말을 번복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의뢰인들과 그들의 끝없는 민원 속에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조금씩 단단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지지고 볶던 자활센터 간병 사업단의 간병사들과 차츰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게 되었고, 드디어 2013년 12월 나를 포함한 조건부 수급자 4명, 차상위 8명, 합이 12명이 합심하여 ‘어울림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자활 기업을 창업하는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나는 12명이 한배에 오른 그 자활 기업의 대표가 되어 단단한 한 울타리 안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어울림 협동조합의 대표로서 3년 동안, 각 처에서 제각각 일하는 간병사 일의 특성상, 직장과 전문 직업이라는 의식이 부족하던 동료들이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사회 속의 일원이라는 것과 전문 직업의식이 성장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인지 계속해서 이슈가 되고 있는 가사 간병사들의 제도권 진입 및 처우 개선과 바우처 사업 수가 개선 등의 사회적 현안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 동참하고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2017년 9월 어울림 협동조합의 대표를 비상근직으로 변경하여 행정 업무를 도우면서, 그동안 계속 협력하며 돌봄 사업을 전개해 온 부천 나눔 지역자활센터의 또 다른 자활 기업인 희망 나눔 사 회적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가정 관리사를 교육・관리・알선・ 파견하는 가사 사업팀장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현장에서의 일은 종료한 셈이지만, 자활센터의 공제회인 민들레 공제회의 사업 이

사로 활동하고, 전가협 중앙회 지부장, 부천 돌봄 네트워크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여전히 그때 맺었던 귀한 인연들과 소통하며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만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로

  지역자활센터에서 근무할 때 자활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1년 만에 구 임대 아파트 보증금 355만 원을 모았습니다. 물론 제가 살림을 잘한 것은 아니었고, 2013년에 새로 생긴 ‘내일키움통장’에 가입해 지급 해지 조건인 취창업에서 ‘창업’을 했으므로 저축한 130만 원에 235만 원을 매칭 지원받아 큰돈이 된 것이지요!

 

  자녀를 홀로 양육하는 한 부모 수급자로서 기백만 원을 모은다는 것은 일반 사람이 1천만 원을 모은 것에 버금갈 만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활에 성실히 참여하면 국가에서 매칭을 해주어 내가 저축한 10만 원이 두 배 이상으로 돌아오는 제도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그 10만 원마저 쓰기에도 모자랐을 것입니다.

 

  그 전에는 1백만 원이라는 돈을 모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은 반복되는 것이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니, 악착같이 절약해서 버스 안 타고 걸어 다니더라도 10만 원은 꼭 저축했습니다. 걸어 다녀 운동으로 다이어트 되니 좋고, 통장에 돈이 쌓여 내 집을 마련한다는 생각에 까탈스러운 환자에게 가는 발걸음도 새털처럼 가벼웠습니다.

    

 

희망을 디자인하다

  자활 기업을 창업해 일하게 되면서 2014년 ‘희망키움통장’이라는 또 다른 통장에 대한 안내를 받고, 날쌔게 가입해 벌써 3년 만기가 되었습니다. 희망키움통장은 내일키움통장과는 달리 내 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점점 쌓이는 돈이 많아져서 그야말로 요술 램프 같았습니다.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흘리는 더 많은 땀방울이 갑절이 되어 돌아오는 격이니까요.

  그러는 동안 탈수급이 되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주눅 드는 눈물겨운 수급자 신세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 힘으로 생활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조건부 수급자로 지내며 하늘 아래 단 둘인 아들과 나, 맘 편히 누울 곳 한 평 없었던 때 내일키움통장 지원금에 힘입어 구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고는, 처음에는 꿈만 같고 천국 같았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꼬맹이로만 생각했던 아들이 어느덧 청년 티가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큰방 하나와 작은방 하나의 거실 없는 서너 평 집이 좁게 느껴졌습니다.

 

  좀 더 넓은 주거 공간이 필요했지만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만약 희망키움통장이라는 든든한 빽이 없었다면 시도도 하지 못했겠지요. 자활센터에 참여한 초기부터 안내받아 가입한 주택청약저축과 키움통장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납입하면서 매일 한국주택공사의 임대주택 청약 정보를 살폈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국민임대아파트 중 내가 희망하던 그곳 상동 하얀마을이 당첨되었을 때 뛸 듯이 기뻤습니다.

 

  2017년 7월 희망키움통장 만기금 1천3백만 원을 지급받고 여기에 주택청약저축액 1천3백만 원과 푼푼히 모은 쌈짓돈을 더해도 돈이 모자랐습니다. 월세를 최저 금액인 11만 원으로 하려면 최대 보증금으로 5천1백만 원을 납입해야 하는데 1천8백만 원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월세로 10만 원을 더 내야 해서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걱정하는 내게 자산 형성 사업 담당인 사례 관리팀장은 정책 자금으로 연이율 2퍼센트대 저리 대출 상품인 ‘버팀목전세자금대출’이라는 것을 소개해 주었고, 드디어 나는 월 3만 원의 이자를 부담하며, 내게는 거금인 보증금 5천1백만 원의 전세 자금을 마련해 국민임대주택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축은커녕 한 달 생활비도 계획성 있게 쓰지 못해 핀잔을 받던 내가 이 모든 것을 처리해 내다니 정말 기특했습니다.

    

 

누군가의 작은 빛이 되어

  부천 나눔 지역자활센터의 가족이 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근무하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인연을 맺으면서, 처음 방문했을 때 표정이 어두웠던 참여자 선생님들이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걸 봅니다.

 

  나의 예전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오늘의 나 김○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독거려 품어 주었던 지역자활센터라는 든든한 언덕과, 내일키움과 희망키움 등의 자산 형성 사업이라는 국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에 다다릅니다. 나 역시 그런 언덕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샘솟습니다.

 

  그동안 센터의 지원으로 2010년 간호조무사, 2011년 요양 보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센터의 격려에 힘입어 시니어 클럽에서 직업의식에 대한 강의를 하는 강사로 활동하며, 제가 받은 ‘삶의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방통대 문화교양학과에서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2018년 졸업 후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할 계획입니다.

 

  우리는 모두 제각각의 문제로 칠흑 같은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 어둠이 아닌 희망이 있다는 아주 작은 징표—순수한 관심과 환대, 할 수 있다는 격려와 믿음—그런 아주 작은 빛이 되어만 준다면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부족하고 모자라면 버리는 정 같은 사회 속에서, 많이 부족했던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손을 놓지 않았던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오늘도 나는 그 누군가의 덕분으로 하루를 살았음에 감사하며,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되기 위해 밝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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