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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깍쟁이의 자활 고군분투기
  • 년도2018
  • 기관명 순창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영자
  • 조회수1,395

  30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아무 연고가 없는 이곳 순창으로 내려온 지도 어느새 16년이 흘다. 그 사이 우여곡절 끝에 시골에 정착했고, 지금은 지역자활센터에서 나이와 지난 세월을 잊은 채 보람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서울에서 살던 시절이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그 시절은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인생을 뒤흔든 시련의 시간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나는 깍쟁이 아줌마로 불렸다. 남편은 대기업을 다니는 직장인이었고,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크게 모자란 것 없는 평탄한 삶을 이어왔다. 나는 그저 남편을 내조하는 기쁨으로 큰 탈 없는 생활을 해왔다.

 

  안정된 가정과 든든한 남편을 배경으로 나는 남들이 보기에 좀 까다롭고 때로는 냉정하게 보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깍쟁이들이 산다는 서울에서도 깍쟁이 소리를 들었을 게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평소 건강하던 남편이 기운이 예전 같지 않다느니 피로하다는 말을 입에 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부쩍 야위어 간다는 게 느껴졌다.

 

  우선 남편이 먹는 게 부실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식단을 각별하게 신경썼다. 그런데도 남편의 얼굴은 좀체 피어나지 않고 그늘이 드리워져만 갔다. 그러다 말라가는 팔다리와는 달리 배에 복수가 차올라 볼록해졌다.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해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 동안 불안감은 왜 그렇게 커져만 가는지……. 모든 검사를 마치고 간호사가 남편 이름을 불다. 어느 순간부터 땀이 베인 내 손은 역시나 잔뜩 긴장한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마음을 졸이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 얼마 전부터 제 남편이 자꾸만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복수까지 차오르니 무슨 일인가 걱정이네요.”

 

  흥분된 나와 달리 의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검사 결과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의사의 말 중에서 내 귀에는 간경화라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남편의 얼굴도 굳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그런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뭔가 검사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의 검사 결과와 바뀐 건 아니지요?”

 

  나는 거의 횡설수설하며 울먹거리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아픈 남편을 두고 나까지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시 추슬다. 어떻게든 남편을 본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회생시키기 위해 곧장 병원에 입원시키고 날마다 곁에서 간병을 도맡았다.

 

  그런데도 남편의 건강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환자들은 본인이 중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충격으로 증세가 더 악화된다고 하더니 남편도 그런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자 괜히 애꿎은 의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지 두 달이 지나면서 내 가슴에 자리 잡은 돌덩이의 무게만 점점 더해 갔다.

 

  어느 날, 의사가 회진을 돌고 난 후 나를 진료실로 불렀다.

 

“아주머니, 유감스럽게도 남편 분은 호전될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여러 가지로 조치를 취해 봤지만 도무지 차도가 없고 나빠지기만 하는군요.”

 

  그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남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뭔가 눈치를챘는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괜찮아, 여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뭐가 괜찮고,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 도리어 남편에게 화를 내면서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한 병실에 입원해 있던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나를 보고 “무슨 일이에요?” “참 안됐네요!” 하는 염려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나는 그런 말들조차 위선이라고 느끼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 내게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 남편을 책임져야 할 때라고 마음먹었다. 현대 의학은 남편을 포기했지만, 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나는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시골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연고도 없지만 평소 공기 좋고, 물 맑고, 재해가 없는 고장으로 떠올리던 순창으로 귀촌하기로 했다.지인들은 서울 여자가 시골에서 살기는 정말 어렵다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내 귀에는 모든 충고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나는 오직 남편의 병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아니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는 심정으로 시골로 내려왔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무작정 시골로 내려오기는 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서울깍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농사일을 전혀 접해 보지 않았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일을 마을의 아주머니들에게 시시콜콜 물어보는 게 일과다.

 

  내 질문에 아주머니들은 심상한 표정으로 대꾸하곤 했다.

 

“그냥 농사를 지으면 되는 거지 뭘 그런 걸 시시콜콜 따지고 물어요?”

 

  아주머니들에게 농사일은 평생 자연스럽게 익히고 해온 일이라서 내 질문들이 어이가 없을 수도 있었고, 또 그들 자신의 일도 바쁜데 매사에 의지하려는 내가 귀찮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 줄 때까지 물어보고 매달리며 농사일을 배웠다.

 

  그런 나를 주민들이 애처롭게 보았는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귀농이나 귀촌을 한 사람들이 농촌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주민들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남편도 시골의 환경과 생활에 적응해 조금씩 건강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가 시골에 적응하나 싶던 차에 그만 내 몸에 탈이 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얼마나 큰 병이겠냐 싶었지만 지역 병원의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권유를 거듭했다. 결국 떨리는 마음으로 큰 병원으로 갔고, 자궁에 근종이 있어서 들어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제 막 시골 생활에 적응하는가 싶었는데 예기치도 않은 큰 수술을 해야 한다니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골 생활에 빨리 적응하려는 욕심에 몸을 너무 혹사시킨 결과가 아닐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게다가 집안일과 농사일로 눈코 뜰 사이 없는 생활에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건강도 다시 안 좋아져 눈앞이 깜깜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면서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을 책임지겠다며 내려왔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남편을 생각하며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서자며 스스로를 격려하기를 거듭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다른 아무런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암담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의 어려운 형편이 복지 행정의 그물망에 포착되었는지 군청에 있는 사회 복지 공무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가벼운 상담이니 부담 갖지 말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농사일이며 시골 생활, 건강은 어떤지 등등…….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그 공무원은 내게 지역의 자활센터에 나가 일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이고, 내 나이가 몇인데 어디로 일을 다녀요.”

 

“괜찮아요.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괜찮다’는 말이 어찌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디로 나가면 돼요?”라고 되물었다. 그만큼 당시 사정이 절박하기도 했다. 남편 의견은 묻지도 않고 덥석 대답을 해버린 터라 남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어느 순간 내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여보, 나, 일을 다닐까 해요!”

 

  뜬금없는 말에 남편은 “맘대로 해!”라고 좀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자꾸 헛웃음을 짓는 게 내심 나의 결정을 용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뒤 나는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지역자활센터를 찾아 자활 사업과 관련해 상담을 했다. 센터장님은 집에서 기다리면 연락하겠다고 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집에 돌아와 긴장이 풀리니 자활센터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담한 사무실, 눈 쌓인 잔디밭, 잘 다듬어진 조경수, 몇 사람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추운데도 입김을 내뿜으며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

 

‘나도 거기서 일하게 되는 걸까? 이 나이에 직장을 다닌다는 거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남편은 출근 걱정을 하는 내게, 회사 생활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했다. 생전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걱정하는 남편의 마음이 고맙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2013년 1월 7일, 순창 지역자활센터 게이트웨이로 첫 출근을 했다. 교육을 받으면서 ‘나이도 많고 일 못한다는 소리 들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에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교육을 잘 받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꼼꼼하게 교육에 임했다.

 

  교육 중 센터장이 말했던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이 특히 귀에 쏙쏙 들어왔고 제일 기억에 남았다. 빙산은 물 위에 드러난 부분보다 물속에 잠겨 있는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큰 산의 극히 일부분밖에 되지 않는다.

 

  빙산을 우리 삶에 빗대어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가려진 부분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평소 살아가면서 자신이 지닌 능력을 십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해 온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은 힘들고 어려웠으나 내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는 못했으니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열심히 해보라는 말이었다.

 

  게이트웨이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올크린 사업단에 배치되었다. 청소 관련 사업단이었는데, 집에서 하는 청소와는 달리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새로운 개념의 청소다. 위생적으로 전개되는 일 자체도 힘에 부쳤지만, 팀원들이 각자가 서로 집에서 하던 청소 방식을 내세우다 보니 자꾸만 부딪히기 일쑤다.

 

  특히, 자활 사업 참여자들과의 관계가 힘들어 사업 참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렵게 결심하고 들어와 초기에 포기하면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었다. 청소 현장에서 팀원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숱하게 반복했지만 팀장의 청소 교육과 조정자 역할 그리고 팀원들의 양보로 올크린 사업단은 점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팀원들의 청소 기술이 숙련되고 결속력이 강화되면서 공공 기관의 수주 건수도 늘어났다. 사업단에서는 계약한 분야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청소나 손이 필요한 부분은 솔선해서 도맡아 해 신임이 두터워져 날로 날로 신장했다.

 

  그리하여 올크린 사업단은 내가 참여한 지 2년이 되지 않은 2014년 10월 자활 기업으로 독립했고, 내가 인생에서 큰 것을 이루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나는 자활 기업에 참여할 수도 있었으나 나이가 많은 데다 자활 경력이 짧아 무한 경쟁의 시장에 나가 경쟁한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센터 관계자와 상의한 끝에 젊은 사람에게 기업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나는 계속 자활 사업단에 남아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두루 쌓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후 자활센터에 다니면서 어느 순간 성격도 크게 밝아졌다. 서울깍쟁이 아줌마에서 시골의 수더분한 아줌마가 되어 가는 것이었다. 또한 일도 재밌고 집에 있는 남편의 건강도 좋아져 절로 흥이 나서 일을 할 때면 콧노래가 절로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자활센터 사업에 적응하며 언젠가는 나도 반드시 홀로 설 때가 오리라 다짐하며 꿈을 키워 갔다.

 

  자활센터에 몸담은 지 3년이 지날 무렵 팀장이 내게 제안을 했다.

 

“김영자 씨, 운전면허를 따 보는 거 어때요?”

 

“이 나이에 운전을 배워서 어디다 쓴데요?”

 

“아니, 또 나이 타령이시네요.”

 

  팀장의 말에 나는 그만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속으로는 평소 나이를 탓하며 수동적으로 임하는 자세를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금세 웃음을 거두고 활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이 나이에 운전면허를 한번 따 볼까요?”

 

  그제야 팀장이 밝게 따라 웃었다.

 

  내 나이 예순 둘, 스스로도 놀란 결과가 나왔다. 함께 면허 시험을 공부한 참여자 중 가장 높은 점수로 합격한 것이다. 다음날 출근하니 다들 소식을 들었는지 크게 축하해 주었다.

 

“언니 축하해!”


“이모, 축하드려요!”

 

  모두들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마을 사람들도 내가 자활센터를 다니며 운전면허까지 취득했다고 하니 믿기지 않은 듯 거짓말한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기분 좋은 면박이었다. 최근에는 팀장이 “요양 보호사는 어때요?”라며 또 한번 자격 취득을 권했다. 높은 점수로 운전면허도 땄는데 다른 것은 못할 게 뭐냐며 이번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전해 보리라고 결심했다.

 

  사업단 일이 끝나고 밤 9시까지 학원을 다니면서 요양 보호사 시험 공부에 매진했다. 학원 시간을 맞추느라 저녁을 굶는 일도 예사다. 어떤 때는 늦은 시간에 마을로 가는 버스가 끊겨, 없는 살림에 택시까지 타기도 했다.

 

‘다 늙어서 이게 뭔 고생이람.’

 

  순간순간 이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활센터의 배려에 그깟 시험을 못 보겠냐는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요양 보호사 시험도 통과해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남편은 운전면허에 이어 요양 보호사에 합격한 나를 보고 잔뜩 비행기를 태워 주었다.

 

“우리 마누라 보통이 아니네. 그런 능력가인 줄 일찍이 알았더라면 좀 더 젊은 시절에 세상에 내보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럼 지금쯤 큰 인물이 되지 않았겠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요.”

 

  우리 부부는 마주보고 웃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예전 서울깍쟁이 시절의 행복도 소중한 추억이지만 이렇게 스스로가 만든 성취감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더욱 소중한 기분이었다. 이제 내게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아니라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이룬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남들에게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격증일지라도 내가 얻은 두 개의 자격증은 앞으로 남은 인생길에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려운 여건과 환경에서 취득한 자격증이니 더욱 가치와 보람이 있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나를 인정해 주었던 남편의 건강이 지금은 많이 쇠약해졌다. 비록 남편의 건강이 나의 자활 성공과 비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회복을 간절히 빌어 보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이제 내년이면 자활 사업을 그만두는 다소 늦은 나이지만, 남은 기간에 더욱 열심히 스스로를 갈고닦아 세상에 우뚝 서는 것이 모두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 나이 예순 넷, 내 나이가 어때서? 김영자 파이팅!’이라고 마음껏 외쳐 본다.

더욱 더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년의 삶을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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