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홍보

덤벼라 세상아!
  • 년도2018
  • 기관명해운대지역자활센터
  • 제출자김남관
  • 조회수1,498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다시 맞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면 아내와의 이혼이다. 본인인 나만 몰랐다.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이며 이기적이고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던 인간이었다는 것을. 소통? 소먹이 통을 소통이라고 하나? 솔직히 단어의 뜻도 몰랐지만 관심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조금 알아 가는 중이기는 하다.

 

  14년 전 대전에서 가출한 아내와 이혼하면서, 입고 있는 옷과 차비만 겨우 구해 아들 셋을 데리고 어머니가 있는 부산 반송동으로 무작정 내려왔다.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큰 아들인데, 애들 셋이랑 엄마한테 가도 돼?”

 

  엄마가 물어 왔다.

“무슨 일 있어? 애들 엄마는?”

 

“집 나갔어. 그냥 그렇게 됐네……. 엄마 집에 가도 돼?”

 

“그래, 일단 무조건 내려 온나.”

 

  그렇게 나는 양손에 아들 둘, 등에는 세살배기 아들을 업고, 짐도 없이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왔다. 처음 왔을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맹세하고 다짐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지는 약해졌다.

 

  ‘다음에 하지, 안 되면 좀 쉬고 하지.’라는 안일한 마음에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지나면서, 그동안 어머니가 힘들게 일용직으로 벌어 놓은 돈과 어렵게 저축해 두었던 돈까지 생계비로 바닥이 났다. 당장 쓸 현금이 없으니 신용카드를 사용했고, 카드빚까지 늘었지만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현실을 외면한 채 게임에만 빠져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했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11평 전후의 방 두 개가 있는 작은 공간에 여섯 명의 가족이 함께 살았다. 현실이 답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세상과 동떨어진 사이버 세상과 소통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 중학생 아들이 “아빠! 학교 설문지에 부모님 직업을 적으라고 하는데 뭐라고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몽둥이로 내 머리를 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고통이 려왔다.

    

 

나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도 잠시, 나의 생활은 여전히 변함없이 흘러갔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어느 날 아이들과 집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갈 곳이 없던 나는 당시 다니던 교회 쪽방에서 하룻밤을 어렵게 지새우고 다음날 들어갔다.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셨지만, 그 이후 잦은 잔소리와 나가 죽으라는 소리에 자존감은 더 떨어져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자주 했다.‘이 건물 9층에서 뛰어내리면 이 모든 고생이 끝나겠지? 나는 실패자・낙오자야.’ 나만 죽으면 된다는 무책임한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 당시 몸무게가 42킬로그램으로 뼈만 앙상해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쯤 기초 생활 수급자로 선정되었는데, 사실 창피했다. 이전의 세민 제도와 비슷한 것 같았고, 또 나이도 아직 젊은 놈이 뭔 세민인가 하는 생각에 짜증도 났지만, 경제력이 없는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형편에…….

 

  그런데 수급자가 되고나니 신기했다. 국가에서 돈을 그냥 줬다. 그것도 90만 원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이후 주민 센터에서 자활 일을 하지 않으면 90만 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 타의 반 자활 근로를 시작했다.

 

  처음 한 일이 해운대 지역자활센터 재활용 사업(빈병 수거 및 분리)이었는데 자활이라는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인지 얼마 가지 못해 그만두었다. 이후 구청에서 진행하는 벽보 제거 자활 근로 일을 2년 정도 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할 만 했다. 이맘때쯤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발끝 저만치에서 꿈틀거린 듯하다.

    

 

이젠 정신 차리자

  구청에 왔다 갔다 하면서, 구청 내에서 커피를 판매하는 것이 너무 멋있고, 비전 있어 보여 수소문해 본 결과, 해운대 지역자활센터에서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해운대 자활센터와 두 번째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자활센터에 온 이후 개인적인 목표와는 달리, 센터 팀 장님께서 방역・소독 일을 추천해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 이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2011년 신규 사업으로 시작된 방역・소독 사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으며,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기에 많이 모자랐지만 이상하게 이 사업이 꼭 내 것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많은 동료들이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했으나 나는 변함없이 자리를 꿋꿋하게 지켰으며, 그러는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다.

 

  구청과 연계해 진행한 무료 방역 사업은, 지역 주민들 가운데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해충・벌레들과 생활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고, 내 작은 손길로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데 고마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무료 방역 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전문적 지식을 쌓기 위해 서울한국방역협회에서 운하는 소독 방역 전문가 교육과정을 수료해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다져 갔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했고, 각종 컴퓨터 관련 자격증도 취득하는 등 사회의 일원으로 조금씩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 우리 팀을 아니 나를 불러 주는 곳이 생겼다. 나는 해운대구 보건소와 협약해 지역사회 전체를 방역하게 되었고, 유료 소독 작업을 하는 등 소기의 성과도 거두었다.

 

  나아가 아파트를 소독하는 작업도 맡게 되는 등 우리는 동료들과 서로 화합하며 조금씩 성장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고, 방역・소독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할 때쯤 2014년 하반기에 드디어 네 명의 동료와 함께 자활 기업을 창업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를 위해서! 아들들을 위해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수없이 혼잣말을 되뇌며 자신감을 불어넣고자 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더라!

  자활 기업은 창업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사업자 등록증을 발급하려고 했더니 내가 신용 불량자로 되어 있었다. 이전에 사용했던 카드 대금 이외에, 이혼 전에 작은 음식 가게를 하면서 5백만 원짜리 어음을 끊어 준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상대편에서 법원 등재를 걸어 놓는 바람에 금융권에서는 조회되지 않았지만 신용 불량자로 등록되어 있어 사업을 운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생겼다.한참을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동생에게 평생 처음 부탁이라는 걸 해봤다.

 

“내동생 남형아! 형이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신용 불량자라서 안 된다네……. 혹시 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는 동생이 물었다.

 

“얼마가 필요한데?”

 

“5백만 원 정도…….”

 

“그래 알았어. 나도 가진 돈이 없어서 내일 대출해서 줄게. 5백만 원이면 되는 거지?”

 

  나를 믿어 준 동생이 한없이 고마웠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체 ‘이제는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다음날 내 통장에 5백만 원이 입금되었다. 그 길로 직접 채권자에게 변제하고 필요한 서류를 받아 법원에 제출해서 신용 불량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014년 8월 29일도 해가 뜨더라

  2014년 8월 18일 ‘자활기업 zeroV’ 인정을 받게 되었다. 우 리는 창업과 동시에 지역자활센터로부터 방역・소독 관련 각종 장비와 차량 2대, 무상으로 사무실과 사무용품을 지원받았으며, 거래처 또한 그동안 자활 근로 사업으로 관리해 오던 30개 이상 시설(업체)들을 바로 연계시켜 주었다. 한마디로 밥과 반찬, 그것을 담을 그릇까지 챙겨 준 것이다.

 

  하지만 고마움과 감사함을 뒤로한 채 앞으로가 문제다. 이런 많은 지원과 후원을 언제까지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4명 중 사업이나 행정 업무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모두 우왕좌왕 하는 건 당연지사고, 그렇다고 내가 대표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할 수도 없었다.

 

  창업하고 첫 4개월 동안 매출이 5백만 원이 안 되었다. 월 급여 수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산수만 할 줄 알아도 우리 기업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길어야 1년, 아니면 그보다 짧은 6개월?’ 시작과 동시에 좌절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나를 응원해 주고 대출까지 해 신용 불량자에서 벗어나게 해준 아들들과 동생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고, 나를 믿고 따라온 3명의 동료들과 자활센터에도 당당해지고 싶었다.

 

  지역자활센터 팀장님께 의논했다. 그리고 팀장님은 물심양면 지원해 주었다. 나 또한 여기저기 발 벗고 뛰어 다녔다. 그동안 거래가 끊어진 곳, 그동안 등지고 살았던 주변 사람들, 팀장님이 연결해 준 자리 등, 주말이든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일이 있는 곳은 어디든 뛰어다녔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노력했다.

 

  이렇게 주변의 여러 도움과 노력으로 길어야 1년 갈 것 같았던 우리 기업은 2015년 1년을 무사히 넘기고, 그해 매출도 4천만 원 이상 달성되는 성과를 얻었다.

 

  그 사이 동료들의 의식도 긍정적으로 변화했다.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게 되었고 부족한 역량은 자활센터와 다른 자활 기업에 도움을 청해 해결하는 등 스스로 노력하는 자활 기업이 되고자 노력했다.

    

 

찾아온 기회와 도전!

  노력이 가상했던지 소독・방역만 하던 우리에게 해운대 지역 자활센터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센터가 운하는 학교 상주 청소 인력 관리를 제안했고, 뜻을 모아 심사숙고 한 끝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했다. 법인 설립, 사회적 기업 또는 예비 사회적 기업 지정, 노무관리, 회계 관리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또 새로운 도전이다. 하지만 나는 설레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또 생긴 것이다. 2016년부터 준비하고 제출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2016년 6월 20일 법인 설립 / 2017년 4월 27일 지역형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되었다. 만약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모든 계획과 준비 사항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을…….

너무도 감사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2016년 매출이 9천만 원 정도로 2015년보다 1백 퍼센트 이상의 성과를 이루었다. 매출도 좋았지만 동료들이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자존감을 회복한 것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니었나 싶다.

    

 

위기는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 했던가!

  2016년이 되면서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제법 큰 위기다. 그동안 무상으로 사용한 사무실 겸 창고를 비워 줘야 하는 상황이 왔다. 건물이 팔리면서 자활센터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고 적립해 둔 돈도 없었으므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신세가 된 것이다. 급한 대로 갈 곳이 없었기에 아는 지인 창고에 물건만 맡겨 놓았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사무실 없이 집에서 서류를 만들고 행정 업무를 보았다. 그렇게 현장과 행정 업무를 병행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하나, 다시 절망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때마침 타 지역자활센터와 연대 사업을 추진 중이는데 저소득층을 상대로 약 1 천만 원 정도의 방역・소독 사업을 제안 받았고, 우리 기업과 수의 계약을 하게 되었다. 2015년 10월에 시범 사업으로 한 것이 채택되어 2016년 4월에 수의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금액으로 사무실 임대 보증금을 마련했고,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사무실을 임대하고 나니 빚 하나 없이 우리 힘으로 사무실을 계약했다는 것이 너무나 뿌듯했다.

 

  2016년은 다사다난한 시기고 수많은 변화 속에서 안으로 밖으로 성장한 해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12월 급여를 제 날짜에 성과금까지 지급하기도 했다. 2017년 신년회를 하면서 동료들께 큰절을 했다. 절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앞으로도 함께 공동운명체가 되자고!

    

 

어머니 말에 가족은 살이 부대껴야 하는 존재라고

  14년 전 헤어졌던 아내와도 연락이 되었다. 아내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린 나이에 아이 셋을 낳았고 힘든 가정생활에 벗어나고 싶어 한 아내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내와 애들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자활을 하면서 나 자신이 당당해졌고, 자존감을 회복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얼마 전 큰 아들은 군대를 제대하기 전 마지막 휴가 때 엄마 집(대전)에 다녀왔고 외갓집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세 아들이 함께 외갓집에 다녀왔고, 14년 만에 처음으로 다섯 명이 함께 거제도로 가족 여행도 다녀왔다. 나를 위한 것도 있지만, 아들들이 장가가기 전에 엄마를 찾을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다.

 

  현재 지금은 서로 조심스럽게 좋은 만남만을 이어가고 있다. 서로의 시간과 상황이 허락되는 그때, 우리 가족이 14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 확신하면서…….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도와준 국가와 지역자활센터, 나의 동료들이라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덤벼라 세상아!

  우리 기업은 아직도 많은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다. 한 번에 된 것이 있었냐고. 우리의 원래 모습대로, 우리의 원래 색깔대로, 어떤 시련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인생도, 사업도.

나와 동료들은 오늘도 감사함으로 생활하며 도전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