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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 나를 꿈꾸게 만드는 삶의 디딤돌
  • 년도2018
  • 기관명광주광산지역자활센터
  • 제출자 엘리자베스
  • 조회수1,550

  안녕하세요!!! 저는 필리핀에서 온 엘리자베스티두레이입니다. 2004년 2월, 한국인 남편과 국제결혼을 했으며, 그해 3월 한국으로 들어와 14년째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세 명의 예쁜 딸을 낳았으며 큰아이는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예전 필리핀에서 생활할 때, 주변에서 국제결혼을 통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종종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없이 “나도 한국인과 결혼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거짓말처럼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모든 게 어려움 투성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댁 식구들과의 의사소통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노력과는 반대로 시댁 식구들과의 의사소통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아이를 임신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더욱 놀라운 사실을 시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초등학교 시절에 머리를 다쳐 뇌에 이상이 생겼으며, 그 후유증으로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사고 수준 이하의 지적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막연히 언어가 통하게 되면 남편과 소통의 어려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저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남편의 장애를 확인하고 나니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과 의사소통에서 오는 문제의 실마리는 찾았으나 그 이후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고 계속적으로 힘든 상황과 마주하면서,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여서 제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갈등과 방황 속에서 첫 아이를 낳았고, 그것에 발목 잡혀 살다 보니 다시 둘째와 셋째 딸을 연거푸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시아버지의 습관적인 술주정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날도 많았습니다. 술을 드실 때마다 저희 집에 찾아와 이해할 수도 없는 거친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위협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자식과 외국인 며느리, 그리고 손녀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셨을까요?

 

  그렇게만 살 수 없었기에 한번은 제가 칼로 손목에 상처를 내어 자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시아버지도 충격을 받았는지 술주정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그런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저와 아이들은 그 트라우마에 한 번씩 몸살을 겪고는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남편의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언짢은 말을 듣곤 했습니다. 물론 남편의 장애로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가족이어서 이해하는 부분과 남이 생각하는 부분은 천지 차이이기에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큰딸은 사춘기가 오면서 아빠가 너무 싫다며, 집 밖에서 아빠를 만나면 절대로 아는 척하지 말라는 말도 했습니다. 제게 왜 저런 아빠랑 결혼했느냐고 원망할 때면 마음이 아프고, 남편의 처지를 모르는 딸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결혼 전, 한국인 남편과의 만남은 정말이지 꿈만 같았습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뭐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직후에도 2년 정도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했기에 저는 정말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직장 동료들과의 다툼이 잦아지고, 이런 직장이 싫다며 출근을 하지 않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 증상이 늘어 갔습니다.

 

  그렇게 직장을 무책임하게 그만두고,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국민 기초 수급권에 등록되어 생계비를 지원받게 되었으나, 다섯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여전히 빠듯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경제활동을 위해 알아보다 비아주민센터를 통해 자활 근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세차에 관련된 사업단이었는데, 비가 오거나 날씨가 선선할 때는 상관없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그늘에서 세차를 해도 땀으로 몸을 적시곤 했습니다.

 

  그래도 몸은 힘들지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자부심에 힘들어도 즐겁게 참여했습니다. 매월 자활 근로비를 받은 날은 비싼 것은 아니라도 아이들에게 외식도 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자활 근로에 참여하고 있는 광주광산자활센터의 다문화 가정 지원 사업을 통해 꿈처럼 ‘모국 방문’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한국으로 이주해 온 후 처음으로 필리핀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라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아이들과 10박 11일의 일정으로 필리핀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을 보니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살았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았고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가까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활 근로 사업에 참여한 것은 제 일생에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었으며, 비싼 경비로 엄두도 내지 못했던 필리핀 방문을 지원해 줬으며, 사업단 내 참여자들과 소통하며 한국어도 점점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며, 필리핀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현재, 제게는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직은 한국어를 읽고 쓰는 게 서툴지만 열심히 한을 공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면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합니다. 대학은 이미 필리핀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는 필요가 없으므로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나면 사회복지를 전공해서, 제게 자활 근로 사업을 추천하고, 자활 사업을 진행하는 직원들처럼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한국 생활이 어려웠던 이주민들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제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꼭 그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날을 위해 가정에 충실하며 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간략히 제 14년 한국 생활을 두서없이 정리해 봤는데, 힘든 삶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네요. 바로 제게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그렇게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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